나는 하늘을 처음 만나는 어린 새처럼 하늘을 난다.

하루에 한 번 이상 하늘을 보세요. 그리고 하늘 숨을 깊고 길게 들이쉬세요. 그러다 보면 당신에게서도 하늘 냄새가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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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나는 왕이로소이다.(경호무술창시자 이재영)

경호무술창시자 2023. 11. 29. 08:44

나는 왕이로소이다

 

<우리는 신에게 기도하지 않고 구걸한다.>

종교든 어딘가에 의지한다는 것은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선구자들을 기다리고 스스로 삶을 구원 못 하고, 왕을 기다리고 신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한 건 인간이 주인이라는 선언이다. 인간이 창조의 모든 역능을 끌고 가야 한다. 실질적으로 역사는 그렇게 움직여 왔다.

 

종교는 피난처가 아니다. 도망갈 데가 있으면 안 된다. 나로부터, 내 삶으로부터 도망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자기가 노예면 노예가 아니도록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노예지만 천국에 가면 자유로운 영혼이다.” 노예 같은 말이다. 내가 노예라면 노예라고 받아들이고, 천국 따위는 없으니 여기서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내 발목에 차인 것이 쇠사슬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일본 후쿠오카에는 ‘학문의 신’을 모신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満宮)라는 사찰이 있다. 사찰기원은 신께 소원을 비는 자리가 아니라, 신 앞에서 자신의 ‘결의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신에게 기도하지 않고 ‘구걸’을 한다.

 

<노예의 사회>

1863년 1월 1일,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했을 때 자유를 찾아 떠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노예 대부분은 예전처럼 주인을 받들고 살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갈구하던 자유가 주어졌는데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팔자라고 머릿속에 울타리를 치고 살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건축물이 생기는 곳에는 억압이 있다. 노예들이 채찍을 맞아가며 피라미드를 세웠지만, 자기 묘지를 만든 건 아니다. 타워팰리스를 만든 노동자들도 거기서 살지는 않는다. 거대한 건축물이 있다는 것은 건설한 사람들을 동원했다는 것인데 그 수단이 예전에는 채찍이었고 지금은 자본이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회다 보니 상황이 더욱 교묘해졌다. 옛날에는 노예가 탈출 해버리면 됐는데 지금은 “가서 쉬세요!” 하면 불안해진다. “일하게 해 주세요! 밤새도록 열심히 일할께요!” 교묘한 억압사회로 바뀌었고 억압이 더 심화되었다. 옛날에는 채찍질하면 철조망 뚫고 도망갔는데, 지금은 회사에서 쫓겨나면 ‘이제 난 어떻게 하지 어디서 일하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자기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고 쫓아내도 다시 들어오려고 하는 ‘노예의 사회’가 되었다.

 

이런 모든 것을 극복하려면 싸워야 한다. 지배를 이기는 싸움은 우리 내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노예근성과 거지 근성을 없애야 한다. 우리가 노예로 길러지면 혁명을 일으켜도 새로운 주인을 세운다. 우리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농민들이 기껏 봉기를 일으켜서는 그다음에 왕족으로 왕조를 세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난 항상 노예니까 좋은 왕과 나쁜 왕을 구별할 게 아니라 우리 의식 속에서 다른 왕의 자리를 없애야 한다. 우리는 사극을 보면서 좋은 왕을 기대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왕이 되겠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러니까 전선은 내 안에 그어져 있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노예에게 왕을 시키면 항상 불안해하고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왕에게 노예를 시키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흥미를 느끼며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한 발짝 물러서서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노예근성과 거지 근성을 떨쳐버리고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글: 경호무술창시자 이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