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을 처음 만나는 어린 새처럼 하늘을 난다.

하루에 한 번 이상 하늘을 보세요. 그리고 하늘 숨을 깊고 길게 들이쉬세요. 그러다 보면 당신에게서도 하늘 냄새가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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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미학, 인생은 아름답다.(경호무술창시자 이재영)

경호무술창시자 2024. 3. 16. 14:57

삶의 미학, 인생은 아름답다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

우리의 일상은 많은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지내면서도 무심코 그것들을 흘려보낸다. 아름다운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일까? 그것은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하루가 거기에 죽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저녁을 바라보라! 그리고 만물이 거기에서 태어나기라도 하는 듯이, 아침을 바라보라!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우리에게 『이방인』과 『페스트』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960년)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라' 는 의미로 이 말을 남겻다고 한다. “눈물 나도록 살아라.(Live to the point of tears)”

그러다 보면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고,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어울림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귀 기울이다 보면, 혼자일 때 최고의 나를 만날 수 있으며 세월이 쌓일수록 ‘익어가는 아름다움’을 갖게 되고, 그리하여 종국에는 ‘죽음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비로소 우린 행복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의 짧은 시다. “나는 왔누나 온 곳을 모르면서, 나는 있누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가누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죽으리라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나는 다음의 세 문장을 항상 가슴에 되새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아끼지 마라, 좋은 음식 다음에 먹겠다고 냉동실에 고이 모셔두지 마라. 어차피 냉동식품 되면 싱싱함도 사라지고 맛도 변한다. 맛있는 것부터 먹어라, 좋은 것부터 사용하라, 비싸고 귀한 거 아껴뒀다 나중에 쓰겠다고 애지중지하지 마라, 유행도 지나고 취향도 바뀌어 몇 번 못 쓰고 버리는 고물이 된다. 때가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흰머리 가득해지고 건강 잃고, 아프면 나만 서럽다. 할 수 있으면 마음먹었을 때 바로 실행해라, 언제나 기회가 있고 기다려 줄 거 같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다. 그때를 놓치지 마라, 너무 멀리 보다가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있다.

<아름다운 풍경>

두 부부가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다. 중년의 사내가 창밖을 보며 얘기한다.

“여보 창밖에 온통 초록색이야 모든 것이 아름다워”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는 미소 지으며 대꾸한다.

“맞아요, 모든 것이 아름다워요.”

사내는 계속하여 흥에 겨워 말을 이었다. 그 사내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듯했다.

“하늘은 바다같이 너무 파랗고, 구름은 솜처럼 너무너무 하얗고 태양은 불덩어리를 보는 것 같고….”

승객들은 사내의 행동이 수상쩍어 웅성거리다 한 남자가 아내에게 귓속말로 얘기한다.

“아주머니 아무래도 남편분께서 이상한 것 같습니다.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동조해서 맞장구를 친다. 열차 안에는 잠시 정적이 돌고 다들 사내의 아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제 남편은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모두 잃었어요. 최근에 각막을 기증받아 이식수술을 받았고 오늘 퇴원하는 길이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풍경이, 풀 한 포기, 구름 한 점, 햇살 한 줌이 경이로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열차 안의 모든 승객은 기차가 달리는 내내 창밖을 응시했다.

<무소유, 내 것이 아니므로 아름답다.>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수행할 때, 법정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산을 보고 있으면 만약 저 산이 내 것이라면 이렇게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있을까? 세금 걱정해야지 누가 나무 훔쳐 가지 않나 호시탐탐 지켜야지, 혹시 죽어가는 나무 있으면 살려내야지, 등산객들이 흘리고 간 쓰레기를 치워야지, 이건 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는커녕 태산 같은 걱정 때문에 결국은 골칫덩어리로만 느껴질 것이다. 내 것이 아니므로 아무런 신경 쓸 필요 없이, 아무런 소유의식을 가질 필요 없이, 산야의 꽃길을 따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내 것으로 집착을 가지는 순간부터 걱정은 물밀 듯이 밀려올 것이다.”

밤낮을 설치며 취미가 지나쳐 산을 뒤지고 들을 헤집고 다니는 수집가나 채집가는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한다. 발길이 닿지 않는 산속의 오랜 나무는 모두가 분재로 보이고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계곡의 돌멩이들을 희귀석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산에 있어도 산을 볼 수가 없다.’

<서투름의 미학>

‘서투르다’라는 말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우리는 사회를 정글과 전쟁터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런 전쟁터에서 서투르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빨리, 능숙하게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서투르다는 것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능수능란하게 키스를 하는 이가 첫 키스의 설렘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오래된 무술고수의 피와 땀이 스며든 도복도 아름답겠지만, 처음 무술을 배우기 위하여 도복을 안고 잠을 자던, 설렘과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한국말을 서툴게 하는 외국인의 모습은 왠지 바보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수련에 늦는 외국인 제자에게 빨리 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가 답장을 보내왔다. “사부님 차가 느려서 미안하오. 빨리 올께요.”

처음 학교에 입학한 코흘리개의 풋풋함, 새내기 대학생의 설렘, 그리고 처음 갓난아기와 마주한 부모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기란 쉽지 않다. 아기가 아기 노릇이 처음이듯 아빠도 아빠 노릇이 처음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것을 서툴게 시작한다. 후일에는 다시 못 올 그 느낌을, 서투름을 지금 만끽하길 바란다. 서툰 오늘이 다시 그리워질 테니 말이다.

<부끄러움의 미학>

부끄러움은 꼭 무엇을 잘못한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여자들만 가득한 엘리베이터를 남자 혼자 타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다. 마지못해 탔더라도 그 남자의 얼굴은 금세 홍당무가 되어 눈 둘 곳을 찾느라 안절부절못한다. 학 무리에 둘러싸인 닭 한 마리도 괴롭지만, 닭 무리에 둘러싸인 우아한 학도 부끄럽기 매한가지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많은 부끄러움에 둘러싸여 하루를 지낸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권위주의 문화에서는 허풍과 허세가 부끄러움을 관리하는 임시방편이 되기도 한다.

뭐든지 또박또박 대답하는 아이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앙증맞고 예쁘다. 하지만 어른들의 장난에 얼굴을 붉히는 아이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은 인간의 마음을 깊게, 그리고 좀 더 솔직하게 인정하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뒷모습>

사람들은 대부분 앞을 보고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거울을 보듯 치장하고, 표정을 꾸민다. 뒷모습은 뒷전이다. 하지만 다양한 인물의 뒷면을 담기 위해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의 사진에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가 글을 붙인, 산문집『뒷모습』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얼굴과 달리 등은 감정을 꾸며 낼 수 없다. 정직해서 쓸쓸한 뒷모습은 인체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다.”

누구에게나 뒷모습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감추거나 꾸밀 수 없는 참다운 자신의 모습이다. 그 순간의 삶이 뒷모습에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아무리 얼굴을 보고 웃고 있어도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다 바람맞고 돌아서는 사람의 뒷모습은 어쩐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슬퍼 보이고, 지금 막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의 뒷모습은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짐짓 별것 아니라는 듯 숨기려 해도 어딘지 불끈불끈 생동감 있어 보인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더 정직하게 마음을 전한다.

눈은 앞을 바라보지만, 마음은 항상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봐야 한다. 얼굴이나 표정뿐이 아니라 뒷모습에도 넉넉한 여유를 간직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면 이 세상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숨김의 미학>

우리는 어려서 누구나 숨바꼭질 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술래가 다가올 때는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숨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있는 곳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나를 끝까지 찾질 못해 나만 홀로 남겨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엇갈리기도 했다. 그런 숨바꼭질 놀이가 요즘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진정한 ‘숨김의 미학’은 ‘들키는 것’에 있다. 너무 꼭꼭 숨어버리면 아무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숨바꼭질은 단순히 숨고 찾는 놀이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동무가 술래가 되면 일부러 들켜주기도 하고, 좋아하는 동무가 들키기 전에 내가 먼저 들켜주기도 한다. 그렇게 내가 술래가 되면 좋아하는 동무를 제일 나중에 찾는 소심한 사랑을 한다. 그렇게 숨바꼭질을 했던 아이가 자라면,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실수를 숨겨주는 ‘숨김의 아름다움’을 아는 어른이 된다.

해녀가 바닷속 깊은 곳에서 귀한 전복을 발견하면 자기가 발견한 그 은밀한 기쁨을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 냉큼 따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 온다고 한다. 현대는 모든 것이 다 노출되어버려 진정 숨어있는 것들에 대한 매력을 잃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곡선의 미학>

곧게 자란 소나무보다, 굽은 소나무가 더 멋지고, 잘생긴 남편보다 성격 좋은 남편이 더 멋지다. ​똑바로 흘러가는 냇물 보다, 굽어 흘러가는 냇물이 더 아름답고, 똑 부러지게 사는 삶보다, 좀 손해 보는 듯 사는 삶이 더 정겹다. 일직선으로 뚫린 탄탄대로보다 산 따라 물 따라 돌아가는 길이 더 넉넉하듯 최선을 다하는 사랑보다 배려하는 사랑이 더 아름답다.

<어울림의 미학>

요즘은 혼자 동떨어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있다. ‘나 홀로 가구’, ‘독거노인’, ‘방콕’, ‘오타쿠’ 등이 삶의 한 형태처럼 여겨질 정도다. 컴퓨터, 스마트 폰, 등 사회관계망의 보편화는 이러한 생활을 자연스럽게 만들어가고 있다. 더러는 반려견과 함께 혼자만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어울리며 살아간다. 아무리 혼자의 삶을 살려 해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옷을 하나 장만해도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함께’라는 말이 생겨났다. ‘함께’라는 말은 참 다정하고, 소중한 말이다.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 하면 행복해진다. 친구와 함께, 연인과 함께, 그리고 가족과 함께, 인생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 ‘어울림’ 이다.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며 한 발자국씩 내가 먼저 다가서는 ‘조화로움’으로 우리는 함께하는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사과꽃의 어울림>

이 ‘어울림의 미학’을 아는 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과꽃이다. 배꽃은 ‘이화(梨花)’, 복숭아꽃은 ‘복사꽃’, 그런데 사과꽃은 그냥 ‘사과꽃’이다. 그만큼 꽃으로서 매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이화나 복사꽃처럼은 예쁘지는 않다. 마치 사과나무에 팝콘이 달린 거 같다. 사과꽃은 왜 화려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시기적으로도 하필이면 이화랑 복사꽃이 잔뜩 뽐내고 난 뒤에 피는 꽃이라 집중을 덜 받는 사과꽃, 하지만 사과꽃을 자세히 오래 보다 보면 깨닫는 것이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사과꽃은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무리 지은 이화, 복사꽃처럼 장관을 이루지도 못하지만 혼자선 절대 돋보이려 하지 않고 곁에 있는 초록의 나뭇잎과 어울릴 줄 아는 꽃이다, 주변과 어울림의 미학을 아는 사과꽃처럼 스포트라이트를 욕심내기보다 두루두루 모두 함께 하는 아름다움을 느낄 때, 우린 행복을 느낀다.

<어울림의 비빔밥>

우리의 음식에도 그런 어울림의 미학을 보여 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비빔밥이다.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 그저 식은 밥에 열무김치와 고추장 한 수저 넣고 비비기만 해도 한 끼 식사로 꿀맛이기도 하다. 진간장에 참기름이나 달걀과 콩나물이 들어가면 최고다. 하지만 여러 채소와 나물, 그리고 약간의 맛깔스러운 양념들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비빔밥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재료의 어울림이다. 서로 다른 나물들과 양념들이 한데 어울려 잘 버무려져야 제맛을 낼 수 있다. 어떤 한 재료의 맛이 너무 강하거나 밥알과 잘 섞이지 않으면 비빔밥의 그 오묘한 맛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솜씨 좋은 요리사는 재료에 따라 적당히 데치거나 삶아서 서로 다른 재료들이 어울리게 하고, 여러 가지 양념들의 양을 잘 계산하여 가장 맛깔스러운 양념장을 만들어 낸다.

이 세상의 것들은 대부분 어울림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키고,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아마 창조주가 인간을 만드시고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단지 인간의 모습이 예뻐서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 만물과 어울린 인간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던 것은 아닐까? 혼자서는 아름답지는 않지만 어울림의 미학을 아는 사과꽃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서로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맛있는 비빔밥처럼, 서로를 희생하며 버무려질 때,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삶이 될 것이다.

<외로움의 미학>

사람은 가끔 격하게 외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외로움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바쁘고 정신없을수록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사람도 좀 적게 만나야 한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들 산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게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 모임을 만들고 여기저기 단체에 기웃거린다. 하지만 그렇게 바쁠수록 마음은 공허해진다.

그것은 형편없이 망가진 나 자신을 마주 대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다. 아무리 먹고살기 바빠도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놓치면 안 된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같은 값싼 인정에 굶주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관심을 통해 내면의 깊은 상처를 잊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상처는 그런 식으로 절대 치유되지 않는다.

동물들은 상처가 생기면 병이 나을 때까지 꼼짝 안 한다. 상처 난 곳을 그저 끝없이 핥으며 웅크리고 있는다. 먹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다. 상처가 아물면 그때야 엉금엉금 기어 나온다. 그 하찮은 동물도 몸에 작은 상처가 생기면 그렇게 끝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을 치유한다.

살다 보면 깊이 외로울 때가 있다. 관계가 틀어져서 외롭고, 내 막막함을 누구도 답해줄 것 같지 않아 외롭다. 외로우니까 사람이 그립고, 누군가를 간절히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항상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술잔을 나누고 웃는 얼굴로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람은 있어도, 힘들 때,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눌 벗은 찾기 어렵다. 그럴 땐, ‘나는 나를 벗 삼는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천천히, 조용히, 혼자 걷는다. 왜 그런지 아는가? 천천히, 조용히 걸으면 자신이 가는 길을 감상하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음과 혼란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조용히 혼자 걷고 있으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귀 기울이기가 훨씬 쉽다. ‘나는 혼자일 때 최고의 나를 만난다.’

<낡음의 미학>

현시대는 모든 것이 하루가 다르게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새로운 제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다르게 변하거나 없어지기도 한다. 너무나 빨리, 너무나 많이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이제는 무엇이 옛것이고 무엇이 신상품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시기다.

그에 반증하듯이 요즘은 ‘복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최첨단 디지털카메라나 스마트 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갖가지 웹을 통해 광택이나 흠집 등을 입히는 수고를 거쳐 필름 사진과 비슷한 외양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요즘 생산되는 상품들은 과거와 비교하면 그 질이 현격히 떨어져 금방 폐기하고 다시 사야 마땅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스마트 폰은 약정기간이 끝나기 무섭게 고장 난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알량한 신기술을 감질나게 무장한 신제품이 출시된다. 낡음을 허용하지 않는 이 거대하고 체계적인 사회 속에서 우리는 낡음을 모사한 상품(찢어지고 색 바랜 청바지, 낡아 보이는 가죽제품 등)들을 소비할 때만 낡음을 경험한다.

낡은 것에 대한 향수는 어느 시대에서나 있었지만, 요즘은 앞에 사례처럼 조금 다른 경향을 읽어낼 수 있다. 바야흐로 ‘낡음’ 자체가 상품이 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낡고 아름다움을 그것은 상품이 아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복고 상품이 내 뿜는 가짜 낡음으로부터 잠시 운을 돌려 그리 멀지 않은 우리의 기억 속을 더듬어 보자.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다시 그 아버지의 아들에게 이어진, 시계 줄이 망가진 지금도 잘 작동하는 시계,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로 다시 그 어머니의 며느리에게 이어진, 손때가 묻은 지금도 잘 작동하는 재봉틀.’

<늙음의 미학>

사람에게 있어 낡음은 ‘늙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다.” 늙어가는 길은 처음 가는 길이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이 마음과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해,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곤 하며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찾아본다. 앞길이 뒷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걷게 된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한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며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다.’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다. ‘잘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

폭설이 내린 머리에는 머리카락보다 많은 사연이 있고, 주름이 깊은 이마에는 고뇌하며 견딘 세월의 흔적이고, 휘어진 허리는 그동안 알차게 살았다는 인생의 징표인데, 그 값진 삶을 산 당신에게 그 누가 함부로 말하겠는가? 당신이 남긴 수많은 발자국의 그 값진 인생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젊은이의 자유는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을 기어이 하고 마는 것이고, 늙은이의 자유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젊은이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맘껏 도전하며 자유를 누를 수가 있으며, 늙은이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많아, 맘껏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또한, 늙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 서유석의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노래가 있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죽음의 미학>

인간에게 가장 큰 형벌이 무엇일까? 누구나 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지만, 오히려 ‘인간에게 가장 큰 형벌은 영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무소불위에 권력은 가졌던 진시황제가 영생을 꿈꿨고, 많은 종교가 영생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나 자신이 영생한다.’라고 생각을 해본다면 처음에는 무척이나 좋겠지만 아마도 ‘절대고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늙어가는 모습, 그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속해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그들이 연인, 가족 그리고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일 때, 그리고 그것이 천년, 만년 이어지다 보면 나중에는 아마도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절대고독에 빠질 것이다. 어쩌면 나중에는 죽고 싶다는 오히려 ‘죽기 때문에 생이 아름답다.’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소설’『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적나라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투시력이 있어서 위선을 즉시 꿰뚫어 본다는 말이 있지만, 죽음은 그것마저도 초월하고 수용하여야만 비로소 마지막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죽음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또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은 죽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 최고의 쾌락을 단 한 번밖에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웃을 거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에게 묻겠지

“죽음이 장난입니까? 당신은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할 거다.

“재미있고 행복하다 죽을 수 있어서!”

“스무 살이든, 일흔 살이든, 우리는 이미 이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다. 그러니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다. 죽음이 말해 주는 것들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하면서, 오늘을 가장 빛나게 살고 싶다. 그러니 오늘은 영혼이 춤출 정도로 즐거워 보자.”

- 글: 경호무술창시자 이재영